혼성모방풍경_헤테로토피아의 현장들

오늘날 예술이란 자각을 위한 감상의 대상은 아니다. 예술은 끊임없이 현실과 조우하고 그 속을 파고들어가 현실과의 차이를 없애거나 반대로 현실을 특화한다. 여기서 현실이란 사실적인 묘사나 모방의 의미는 아니다. 가속화된 문명의 발달이 초래한 갖가지 유형의 사회 현상들이야말로 개인과 사회, 자유 의지와 권력 사이에서 방황하는 오늘의 현실을 문제화한다. 과연 하나의 원리나 유일한 가치의 시대를 지나 역사의 굴레에서 해방된 포스트모더니티가 자율적인 삶을 실천하는 시대를 열었다고 보아야 할까? 세계화의 원근법 속에서 도시는 점점 더 거대한 조각(sculpture)1)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고 삶의 터전이 예술적 외양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도 개인미디어의 스펙터클로 진화 중이다. 그래서 오늘날 보여주기란 단순한 쇼잉(showing)이라기보다 존재의 이유가 되어버린 듯하다. 현대예술사진도 이러한 흐름을 동반한다. 오늘날 예술사진이란 전통적 사진의 양식이 아닌 상태이거나 상업사진의 유형과의 차이를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를 추구하는 듯하다. 이는 디지털 사진의 상용화와 더불어 이른바 아날로그 사진에게 부여된 특권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지나친 단순화나 이분법적 분류는 피해야 하겠지만 현대예술사진이란 한편에서는 사진이라는 문화적 양상과 태도를 드러내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장 사적인 영역의 기록으로부터 개인과 사회의 접점을 발견하는 푸코 식의 미시정치학적 관점의 내러티브와 이와 반대로 우리의 삶과 세계를 유형화하여 마치 수집품의 목록처럼 진열하는 방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1970년 이후 여전히 현대사진미학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현대예술사진의 유형이나 양식적 특성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이전에 오늘날 사진예술이 여전히 시대를 증언하는 매체이자 더불어 현대예술사진이 거대미디어의 이미지 권력화와 개인미디어가 다양성이라는 미명하에 역설적으로 기존 미디어를 모방하는 스펙터클화에 저항하는 소수의 의미 있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는 무조건적인 치켜세움이 아니라 적어도 예술사진이라는 명칭이 단순한 기술이나 첨단의 유행이 아닌 예술적 의무를 실천하려는 행동이라는 점을 명시하기 위함이다. 김승구의 다큐멘터리 사진도 이러한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는 대도시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되는 한물간 유행 혹은 과장되고 직설적인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변두리 양식의 인공물, 건축, 실내, 장소 등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하위문화 속 광경들을 유형학적 관점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일련의 사진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적 삶의 단면이 감지된다. 고유하지 못하기에 모방적이고, 흔하지만 소수화 된 상태의 장소가 등장한다. 더불어 그 장소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언뜻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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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의 조각화란 현대건축이 미술을 소비하는 스펙터클로 진화 중이라는 할 포스터의 이론을 참조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건축이 기능주의를 따르기보다 구조와 물질의 상상력을 고도화 한 상태의 조각적 상상력을 닮아간다는 견해이다.

 

변두리 유형

난데없이 상당히 두꺼운 얼음 기둥 두 개가 우뚝 서있다(경기 포천, 2012). 기둥 주변에는 가드 레일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 해괴한 장면은 경기도 포천의 한 식당에서 한겨울에 마당에 물을 뿌려 만든 인공적으로 제작한 빙탑이다. 김승구는 한국 사회가 소비하는 하위문화 속 유토피아라는 환영의 모방물을 사진으로 포착한다. 그는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일탈과 비일상주의라는 판타지를 보여주는 대상들 (사물, 건물, 공원, 도시, 지역 등)을 주목한다. 한국에서 포천의 빙탑과 같은 유형의 대상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로 서울 근교의 유원지를 비롯해 대개의 교외 관광지는 위와 유사한 유형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변두리 유형학은 역사적 맥락, 스타일의 미학이 고려되지 않은 채 무분별한 개발주의에 떠밀려 발생한 혼성모방(pastiche)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예술에 있어서 혼성모방이란 ‘예술의 종말’ 이후 시대에 따라 대표 유파와 그 양식적 특성이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시대에서 벗어나 시대성, 지역성, 원본성이 무분별하게 혼재된 상태로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으로도 볼 수 있는데, 전유(appropriation)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반면 건축과 도시학의 관점으로 볼 때, 혼성모방은 주류 건축 양식의 무분별한 차용, 부족한 솜씨, 철학이 부재하는 신자유주의적 욕망의 표출로 만들어진 맥락 없이 존재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서구적 입장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혼성모방은 탈맥락적인 신자유주의 열병에 휩싸여 나타난 난개발의 흔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변두리 유형은 견고한 사회 시스템 주변에서 일탈의 가능성을 유혹하는 기표가 되었다. 일탈의 기표는 숭고한 자연의 모방으로 구체화된다. 앞선 포천의 빙탑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매우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 “경기 고양”(2016)은 한 식당 벽면 위에 독일 바이에른의 대표 관광지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 백조의 성) 사진이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지역과는 무관한 이미지들이 도시의 외부와 실내를 무자비하게 점유하고 파리의 길거리를 전유한 아케이드, 프로방스 지역을 모방한 관광 단지, 전통을 모델로 기획된 민속촌과 민속을 가장한 오락 프로그램, 보기 좋은 자연 경관 주변에 설치된 분수 장치(서울 연희동, 2015) 등은 혼성모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도 낯을 붉히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홍콩이나 싱가포르만큼 스펙터클한 글로벌 에코 시티를 도시개발모델로 삼고, 다른 한편에서는 글로벌 에코 시티의 첨단 시설과 지리학적 조건을 넘어서는 탈맥락적인 혼성모방의 유형(유령?)이 도시 내부를 잠식해가는 중이다. 이 혼성모방은 소리 없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하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끊임없이 다른 곳, 다른 시간, 다른 차원이 될 수 있다고 고함친다. 문제는 보드리야르가 전한 시뮬라시옹의 경고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혼성모방 유형은 원본 없음을 감추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전체를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김승구가 포착한 사건과 현장 들은 변두리 유형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작가는 이 장면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매일 어딘가로 도피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그리고 혼성모방은 일상의 권태2)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한강 풍경(서울 상암동, 2013, 서울 여의도동, 2013)은 혼성모방의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들 사이에서 은유적 사유를 허락한다.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은 홍수로 범람한 한강을 구경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관람’하기 위하여 그곳에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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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서의 권태는 부르주아의 한가함이나 낭만적 고독함과는 거리가 있다. 반복적 일상과 성과를 위한 강박적 삶이 낳은 도피의 유혹, 즉흥적이면서 가상적인 일탈의 욕구를 반어법적으로 권태라고 불러 보았다.

권태로운 스펙터클

도시의 탄생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교외의 탄생과 연결된다. 교외 풍경의 전형은 거품경제의 영향으로 우후죽순 아파트 개발이 일어나면서 도시의 위생화가 가속화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외는 여가의 장소이자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일탈이 행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억압된 사회에서 가장 쉽게 해방감을 제공하는 교외라는 대도시 주변부는 이처럼 사회적 관습 바깥에 도달할 수 있는 ‘해방의 통로’라는 지역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체성 이면에는 지역이 자립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의 부재로 인하여 대도시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기대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중심부에 기생하는 주변부가 형성되었다. 교외 건축 양식은 이러한 사회적 심리를 반영한다. 펜션, 대형 음식점, 숙박업소 등은 특화된 교외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양의 코티지 별장 양식과 전통을 연상시키는 기호가 혼재하고 값싼 건축자재와 제작이 용이한 방식의 선택으로 세워진 건물들은 경제적 이윤을 최대한 고려한 양식으로 고착되면서 혼성모방 유형은 버내큘러 양식(vernacular style)으로 발전한 듯하다. 버내큘러 디자인은 토속적이고 비전문가의 건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심리의 허약함과 소비주의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스펙터클로도 볼 수 있다.

 

“대중들은 건축이 만들어낸 장치와 분위기를 통해 비일상적 감정을 경험하고 이를 소비하게 된다. 이는 주로 관광센터, 쇼핑지구 및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에서 이용되는 전략으로서 인상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스펙타클’의 공간들이다.”3)

 

신자유주의와 소비주의는 결합하여 건축적 스펙터클을 제공하게 만든다. 버내큘러나 비전문가들에 의해 모방과 차용을 거듭하면서 숭고한 믿음과 세속적 영광을 함께 담는다면, 이른바 미술을 소비하는 테마파크화 된 현대건축은 건축을 엔터테인먼트로 뒤바꾼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가상의 세계를 현실화한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변두리 유형의 혼성모방은 거대한 스펙터클도 전유한다. 경기도 포천의 겨울은 스펙터클의 미니어처 버전으로 얼음 축제를 조악하게 모방한다(경기 포천, 2014). 사람들은 디지털 사진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송한다. 그들은 소셜네트워크 안에서 본인이 속한 장소를 초월하려는 시도를 했을지 궁금하다. 그들의 속임수가 성공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교외 건축과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변두리 유형은 포스트모던의 다원주의로 해석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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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순섭, 오준걸, “서울 근교 교외소비지역 ‘건축의 스펙터클화’ 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29(5), 2013. 5, 151쪽

의미 바깥의 변두리화

버내큘러는 차별적인 단어이다. 이 용어는 단순히 한 지역의 고유한 언어와 특유의 건축이라는 의미 외에도 지방색, 사투리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 의미들은 건축 양식이 조형적 성격뿐만 아니라 사회적 서열로 판단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외 건축물들은 그 양식적 유사성과 혼성모방적 성격에 의하여 변두리 양식으로 기호화된다. 김승구가 포착한 도시의 단면들은 연극적일만큼 과장된 장소들이다.

“서울 화양동”(2014)은 운전면허연습장으로 보인다. 면허연습장은 특정 양식에 의하여 권위나 가치를 내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기능에 충실한 곳이다. 흥미롭게도 이 연습장 내부는 불상, 동물상, 석탑 등이 메운 정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당연히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경관이겠지만 이 연습장은 마치 조각 공원을 모방하고 있다. 이곳의 조각상들이 있어야 할 곳은 사원이어야 하겠으나 종교적 맥락이 부서져 기표와 기의가 서로 분리된 상황을 보여준다. 21세기는 생산자와 소비자, 작가와 관객이 하나인 사회로 변모 중이다. 화양동의 운전 연습소의 조각상은 한국의 오랜 문화의 잔재를 보여주는 기호이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던시대는 문화적 표상에 깃든 의미가 사라진 텅 빈 상징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혼성주의는 후기식민지적 문화담론으로 카리브해의 식민지 출신이 과거 제 1세계로 이주한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스레 식민지와 주류 문화가 섞이면서 수직적인 만남이 수평적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문화정체성이 이질적 요소들로 뒤섞이는 혼성적 경험에 대한 내러티브를 의미한다. 즉 문화정체성은 다양한 요소와 경험의 혼합물로 보아야 한다.

 

김승구의 사진은 교외의 탄생과 여가 활동이라는 문화적·사회적 현상이 만들어낸 이질적이고 과장된 한국 사회의 단면을 주목한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사진에 등장한 이질적 기표들의 혼합체는 원본의 의미가 부재하거나 변질되어 결핍과 과잉의 이중적 심리상태를 강하게 표출한다. 그렇다면 의미의 혼돈 상태에 빠진 혼성모방풍경을 호미 바바가 주장하는 서구주류문화에 대항하여 새로운 문화정체성으로 상정할 수 있을까? 바바는 문화란 차이들로 구성되었고 다양한 차이들의 교류/교섭이 이뤄지는 장으로 보았다. 즉 문화는 결코 하나의 원리나 양식으로 통일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혼성주의는 견고한 모더니즘의 현상, 이론을 매개로 전통(민속)을 대표하는 타자의 문화와 전통을 버린 새로운 유형의 모던한 것을 대표하는 서구(주류)의 교섭에 의하여 발생한다. 더불어 이 혼성주의가 단순히 옛것과 새로운 것, 주류와 비주류의 결합이라는 측면보다는 관습화된 문화정체성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반면 김승구의 혼성모방풍경 사진들은 견고한 문화 질서를 교란하는 유의미한 하위문화정체성을 구축하기보다는 성공의 경주에서 탈락한 하위주체의 현실이 변두리 유형학으로 특화되었음을 재차 각인시킨다.

 

도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대개 우리가 소비하는 도시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수직 상승하는 건축의 스펙터클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표상하고, 다른 하나는 도시의 스펙터클 속에 가려진 다양한 형태의 삶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삶이란 서로 개인의 의견과 취향을 드러내지만 이 다양성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반드시 대변하는 현상이라고 쉽사리 말할 수는 없다. 사회적 네트워크에 의하여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이미지와 텍스트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매우) 자율적인 소통의 장을 형성한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적 미디어 플랫폼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이상적인 가치가 실현된다고 감히 단언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개인미디어부터 공공미디어까지 상호적 소통 가능성이 거대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와는 정반대로 미디어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그 모든 것들은 곧 스펙터클로 전유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누구나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지만 결국 우리 대부분은 미디어의 훌륭한 관객이 되는 셈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 정현 (미술비평, 인하대 교수)